“지금 바다에 놀러가지 않을래요?”
이틀 전, 점심을 먹고 나서 책상에 앉아 올해 쓸 가계부 양식을 만들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이 보고 싶은 마음과 바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단 예스를 외쳤다. 마침 또 다른 친구도 하던 일이 있어서 노트북을 가져간다고 해서, ‘나도 가서 가계부를 마저 적어야지’ 하고 노트북을 챙겼다. 친구의 차를 타고 급 여행을 떠나는 상황에 신이 났고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겨울 바다는 너무 아름다웠다. 날이 추웠지만 눈이 내린 모래사장과 하얀 파도 그리고 파란 바닷물의 조화가 생경하여 더 오래 보게 되었다.
1박 2일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컨디션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전날 신나서 조개구이와 함께 술을 마심으로 얻은 숙취 약간과 낯선 환경에서 자느라 잠을 푹 자지 못해 얻은 피로감, 그리고 여행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몇가지 마음의 부대낌을 느꼈던 것이 계속 떠오르는 탓이었다. 게다가 가계부 작업은커녕 주말에 읽어야 했던 반납기한이 코앞인 책들을 읽지 못했다는 것도 집에 돌아와서야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마음의 불편함 때문인지 저녁이 되자 불안이 몰려왔다. 티비가 꺼진 조용한 집의 공기가 너무 낯설어서 일단 음악을 틀고, 용기 있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설거지를 해치웠다. 곧바로 이어서 집 바닥을 걸레질 했고, 걸레를 빨아널어놓고 따뜻한 물을 맞으며 샤워를 했다. 불안을 잊는 데에는 몸을 바삐 움직이는만큼 좋은 대책이 없다. 샤워 덕분에 덥혀진 몸을 쇼파에 눕히고 벽에 올려둔 다리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불안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적으면서 ‘인스타그램에 우울감을 털어놓는 고백 따위도 올리지 않을 수 있다면...’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나서 <나의 F코드 이야기>라는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우울과 불안, 약간의 강박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표지에 적혀있었다. 작가님의 처음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 사실이 위안이 되기보다 불안했다. 나도 정신과에 가야하는 게 아닌가, 현재 받고 있는 심리 상담이 나에게 부족하거나 부적합하지는 않나, 나도 약을 먹으면 더 안정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녁 요가고 뭐고 하기 싫어서 10시부터 이부자리를 폈다. 책을 조금 더 읽다가 10시 반쯤 잠든 것 같다. 오늘은 8시에 알람소리에서 깼고 잠을 오래 잔 덕분에 몸의 컨디션은 평소로 돌아왔지만 마음의 불안과 피로감은 남아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정말 패닉이 올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이 들어서 아침요가를 하고, 아침식사를 만들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세수도 하고 책상에 앉았다.
글을 써야하는 시간인데 하기 싫고 귀찮아서 일단 지금의 마음이라도 적어보자고 넋두리를 적고 있다. 그래도 루틴을 지키면 몸이 익숙해져서 생활리듬이라는 게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몇 주 하다보면 지킬지 말지 고민하는 시간이 줄고 일단 하게 될 확률이 커질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60분 글쓰기는 지키기가 가장 어렵다. ‘의욕도 없는데 글은 쓰지 말고 책읽기로 대체할까’ 안할 궁리하다가 겨우 책상에 앉았다. 글쓰기를 같이 할 동료를 찾거나 아니면 혼자서라도 목표를 정하면 이뤄가는 재미가 생겨 지키기 수월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는 만화그리기나 그림 그리기도 하고 싶다. 지금 나는 울상인 얼굴로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 글의 제일 첫 문장은 ‘오늘은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였는데(다시 보니 없어도 될 문장이라 뺐다), 어느새 의욕을 찾기 위해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다. 이런 것은 칭찬해주어야하는 게 맞는 걸까. 애를 쓰는 나에게, ‘우울할 때는 좀 쳐져있어도 괜찮은데 뭘 또 그렇게까지 의욕을 내려고 하니? 너는 그래서 문제야.’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게 아직은 많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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