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자 평소와 다른 날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을 기대했다. 최고기온이 15도까지 올라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저번주에 강추위를 겪으면서 계속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따뜻해질 날을 기다렸다. 한겨울이지만 오랜만에 날씨가 포근해서 베란다 문을 양쪽 다 열고, 집에서 밖으로 통하는 문과 창문을 모두 활짝 열었다. 우리 집은 베란다 샷시와 현관문이 마주보고 있어서 둘 다 열면 바람이 집안을 관통해서 지나간다. 이집에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무척 기분 좋은 일 중에 하나다. 식물들을 전부 베란다 창가에 내놓고, 테이블야자의 가벼운 이파리들이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삼일 전까지만 해도 영하 18도까지 내려가서 베란다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고, 보일러를 틀고도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오늘은 반팔을 입고 있어도 괜찮다. 영락없는 봄날씨라고 생각하면서 한겨울에 따뜻한 나라에 여행을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두 달 간 묵었던 숙소를 떠올렸다. 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라벤더화분을 발코니에 내놓고 키우며 비바람이 많이 불면 들여놓고, 날이 좋으면 내놓고 하던 거다. 두 달 남짓 머무는 여행지에서 화분을 사서 키운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단지 관광지에 여행온 게 아니라, 그곳에서의 생활도 한국에서와 똑같은 하루라고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챙겨먹고, 장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탱고 수업을 듣고, 밤에는 술을 마시고 밀롱가에 다녀와서 잠들고, 그런 일정한 생활 속에 있다는 기분 말이다. 거기에선 비가 와도 포근했고 우울해도 왠지 그럴듯 하게 느껴졌다. 또 쇼파에 누우면 시야가 하늘로 꽉 차던 아파트에서 하루에도 몇번이나 멍하니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을 구경하던 일도 좋았다. 그때가 2월이었으니까 한국에서 한참 막바지 추위를 겪다가 지구 반대편으로 가서 갑자기 따뜻한 날씨를 만난 것이다. 갑자기 이불 속에 들어간 것처럼 포근한 날씨에, 옷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샐러드와 두부조림을 만들어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기다리던 분리수거함이 도착했다. 이사왔을 때부터 눈여겨보던 상품인데 마침 세일을 하길래 이때다 싶어 구입했다. 택배 상자를 풀어서 현관 앞에 자리를 잡고, 8개월 동안 임시 분리수거함으로 사용하던 장바구니는 정리하기로 했다. 장바구니 안에는 어떻게 분리수거해야할지를 몰라서(검색하기가 귀찮아서) 계속 버리지도 못하고 쌓아둔 물건들이 들어있다. 이참에 정리하기로 하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고무장갑 두켤레는 일반쓰레기로 버리란다. 1-2분이면 간단하게 답을 얻을 수 있는데 귀찮아서 미뤄두느라 마음에 짐을 지고 살았다니. 장바구니에 들어온지 몇달째인데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캔들은 남은 초를 나무젓가락으로 파서 일반쓰레기에 버리고, 보관용기는 깨끗이 씻어서 유리로 분리수거하라고 한다. 예상과 달리 별 어려움 없이 부드럽게 잘 파진다. 유리에 묻어있는 캔들은 휴지로 싹싹 닦아낸 후, 다시 물티슈로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물로 헹구어 손으로 뽀득뽀득 문질러주었더니 새것처럼 말끔하다. 그 중 하나는 컵처럼 생겨서 커피믹스나 차를 담아두는 용도로 자체 재활용하기로 했다. 공짜로 괜찮은 유리컵을 얻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양파망은 비닐로 분리수거 하라는데, 혹시 쓸 곳이 생길지 모르니 잘 개어서 서랍에 넣어두고, 떼굴떼굴 굴러다니던 건전지는 다음에 동사무소에 들러서 버리기로 했다.
오후에는 책상에 앉아서 집중을 좀 해보려고 했더니, 커피가 마시고 싶다. 카페에서 파는 맛있는 커피. 먹고 싶은 게 떠오를 때 먹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생각이 나서, 가능하면 빠르게 욕구를 채우는 게 결과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이다. 2-3개월 전에 집앞에 생긴 카페가 있는데 테이크아웃으로 아메리카노가 천원이었던 것 같다. 옆동 사는 친구가 커피맛도 꽤 괜찮다고 했으므로 텀블러를 챙겨 간단하게 나갈 채비를 한다. 나가는 길에 택배 상자도 버리기로 했다. 예전에는 박스를 그냥 버렸는데 얼마 전에 분리수거장에 박스는 테이프를 다 뜯어서 접어 배출하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고 열심히 하고 있다. 테이프를 뜯어서 박스를 접고 종이로 분리수거를 하고 나니까 별 것도 아닌데 성취감이 몰려온다. 옆에 있던 다른 아파트 주민은 박스를 그냥 버렸지만 나는 올바른 방법으로 배출했으므로 괜히 좀 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휘파람을 불면서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잔뜩 끼어서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온도는 여전히 포근하고 비가 와도 집이 바로 앞이므로 별 걱정은 없다.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진다. 5분만 늦게 나갔어도 비를 맞을뻔했는데, 운이 좋다. 까마귀가 까악까악 우는 소리를 들으니까 꼭 일본에 여행온 것 같다. 이상하게 우리집이 평소보다 좋아보인다. 새로운 분리수거함 덕분에 더 쾌적해졌고, 오랜만에 바람을 맞아서인지 집이 조금 더 가벼워보인다. 집이 마치 여행지에서 지내고 있는 숙소처럼 느껴져서 여행자의 입장으로 집을 다시 둘러본다. 그렇다면 이 숙소는 꽤나 맘에 드는 숙소이다. 내 맘에 드는 물건들로, 내 맘에 드는 자리에 배치했으므로 당연한 건가. 이 집에 사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더 될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여행지처럼,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면 좋겠다. 그래야 더 감사하고 특별하게 느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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