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미루고 미루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의 사업체를 꾸릴 거라고,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고 운영해나갈 거라고, 늦어도 서른 다섯 전에는 시작할 거라고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는 실컷 미루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그 방향을 보고 걸었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을 때, 아 지금이다! 라는 마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다른 사람의 주방에서의 일을 경험해보자고, 밥도 팔고 술도 팔고 손님도 많은 곳에서 일을 해보자고 마음 먹었고, 마침 집 근처에 있는 적당한 곳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벌써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4개월이 가까워져간다.
일 자체는 재밌다. 손님들이 몰려오고, 주방에 주문서가 출력되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정확한 레시피대로 만들기 위해서 집중하는 그 순간이 좋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나는 그 상황에 집중하고 꽤 괜찮은 결과값을 낸다.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하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놓고 결제를 하고 맛있게 먹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 그러니까 손님과 대면하는 일도 좋다. 일이 끝나면 온 몸이 끈적거리게 땀을 흘려서 집에 가자마자 깨끗하게 씻고 휴식하는 기분도 좋다. 몸을 쓰는 일이 좋다.
사장의 영업 마인드와 근로자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손님을 기본적으로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태도와 근로자의 권리를 자꾸 침해하고(주휴수당을 안준다. 시도때도 없이 단톡방에 공지사항을 말하고 답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실수하면 좀 심하게 갈군다. 사람을 갈궈야 일을 잘하게 된다고 믿는 듯) 그것에 대해 의견을 이야기하면 대들지 말라고 한다. 구시대적인 생각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과 하루 종일 붙어있어야하는 것이 꽤나 괴롭다. 나는 싫은 것을 숨기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식당의 모습과 지금 일하는 식당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 처음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방에서 일하는 경험 자체가 새로웠기 때문에 소소하게 배울 것도 많았는데 (주방 공간 배치나 아주 기초적인 칼질, 재료 관리, 주방에서의 몸쓰기 등) 이제는 왠만한 것은 익숙해졌고 더이상 배울 게 없다고 여겨진다. 이곳에서 일하는 게 적은 급여 말고 얻을 게 없다고 생각되니 지루하고 시간이 아깝다. 손님과의 사이에서 뭔가 미래지향적인 가치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장사에 대한 마인드를 공부하고 싶다. 노동자를 소중히 대해주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가게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음식을 청결하게 조리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일을 오래하지는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요즘 사장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안함이 커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등의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는데 사장과의 갈등이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지레 겁이 난다.
다른 곳에 가도 요식업계가 비슷한 상황이겠지 싶어서, 차라리 확 당겨서 비건 식당을 빨리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럴듯하지 않더라도, 애초의 계획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더라도 말이다. 오늘 세시간 정도 자리에 앉아서 (미루고 미루던) 아워플레이스 시작에 대한 고민을 했다. 여러가지 선택지를 두고 알아볼 것들을 검색해보고, 당장 해야할 것들을 떠올렸다. 창업 계획서 작성하기, 창업 지원금 신청 시기 조사하기. 창업 계획서를 적어본 후에는 당장 가게를 얻을지 아니면 청년몰에서 우선 작게 시작해볼 것인지 결정해야할 것이다. 결정을 위해서는 원하는 동네에 점포 시세 알아보고, 청년몰 신규 입점을 선택한다면 메뉴부터 개발해야할 것이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동생과 상의도 해보면서 현실적인 부분들도 고려 중이다. 막상 고민을 본격화하니깐 걱정되기보다는 설레고 재밌는 마음이 더 든다. 이러다가 또 말 수도 있어서... 어떻게 되려나 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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