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종결할 때는 그저 상담 선생님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크더니 종결 후에야 앞으로 어떻게 나를 돌봐야 할지가 막막해졌다. 그동안 자동적 사고 기록지를 쓰면서 ‘다음 주에 상담 선생님과 같이 얘기해봐야지’하고 생각했는데 이젠 선생님과 마주 앉을 다음 주가 없다. 상담 선생님의 권유로 ‘자동적 사고 기록지’라는 것을 매주 숙제처럼 적어왔다. 선생님은 종결 후에도 혼자서 꾸준히 적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당분간은 좀 게으르게, 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도 좀 멈추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주에 알바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상황들이 생기고 불편함이 올라와 어제는 책상에 앉았다. ‘기댈 곳이 없으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다.’ 하고 주문을 걸으며 메모장을 켜고 기록을 시작했다.
주방 알바 시작한 지 5일 차. 사장님이 벌써 몇 번이나 했지만, 또 말한다. 동작을 빨리하라고, 말도 빨리하라고, 손이 느려서 요리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고, 이건 집에서 친구들 대접하는 것과 다르다고. 그 말을 들으면서 좌절감이 넘실거렸다. 그 단어들의 의미와 사장님의 어투나 표정에서 기분 나쁜 구석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몰두한다. (평생 해왔으므로 아주 전문가이다.) 나는 손도 느리고 말도 느리지... 가족들이 나한테 덜렁댄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나는 실수도 자주 하고, 힘도 약하고, 자신감도 없어. 줄줄이 소시지처럼 평소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어진다. 지난 실패의 경험들도 ‘불러오기’ 된다. 직장 생활을 몇 번이나 해봤지만 매번 상처받고 그만뒀고, 새로운 길을 찾자고 도전한 농부도 결국 전업농은 어렵겠다고 두 손 들었고, 관심 있는 마지막 일로 식당 운영에 대한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주방 보조를 시작했는데 이것마저 못하면 나에게는 진짜 살아갈 길이 없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그냥 나란 인간이 문제인 거 아닐까. 끝도 없이 돌고 도는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 구렁텅이에 발을 헛디딘 것 같다. 그럴 때 자동적 사고 기록지는 도움이 된다. 일어난 상황, 상황으로 인해 자동으로 떠오르는 생각들, 그로 인해 드는 감정들, 그래서 어떻게 행동했는지까지 적는다. 이걸 상담 선생님과 15주 동안 했더니 부정적으로 흐르는 사고의 패턴을 몇 개 찾을 수 있었다. 자주 빠지는 사고의 패턴에 또 빠져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다 망할 것이고, 잘하지 못할 거라는 부정적인 미래가 그려지고,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사람들이 이런 무가치한 나를 싫어할 것 같다. 부적응자로 세상에서 영영 소외될 것만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과거의 상처들 때문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외부의 사소한 자극에도 수시로 나를 나락으로 끌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인식하고 나서 다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다르게 보인다. 상처받은 여섯 살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채찍도 내려놓고 사나운 눈초리도 부드럽게 다듬는다. 나는 주방 일이 난생처음이고, 고작 3시간씩 5일 일했기에 벌써 오래 일해온 사람처럼 빠르고 익숙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더듬거리고 실수도 더 잦은 게 당연하다. 사장님의 말처럼 빨리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집에 가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도 하고 도우 미는 연습도 하고, 모든 일을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도 여러 사람에게 들었으니까 적어도 아주 못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다. 사장님이 나를 비난하려는 의도로 그 말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직원에게 일을 알려주고 직원이 빠르게 일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나에겐 이게 최선이므로 현재로서는 무슨 수를 써도 사장님 기대에 맞는 속도를 낼 수 없다. 그저 계속해서 노력할 뿐이다. 한 달 정도 해본 후에 내가 정말 손이 빨라지지 않고, 도저히 이 주방에서 일할 수 없다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식당을 낼 때 아주 빠르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는 메뉴들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다. 나의 최종 목표는 식당 운영이지, 일을 아주 빠른 속도로 하는 것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니까.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일을 빠르게 하라는 말에 내가 무가치해질 것까지는 없다. 덧붙여서 내 변호를 좀 더 하자면 지금까지 다녔던 직장에 잘 안 맞았던 게 내 잘못은 아니다. 잘못이 있다고 해도 나보다 상사들의 잘못이 컸다. 그리고 맞지 않을 수 있다. 누구나 직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살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농부나 식당 창업에 대한 꿈을 그렸고, 농부 교육 프로그램을 반 년 간 체험해봤고, 이제 식당일을 경험해보려고 조건 맞는 곳을 찾아 새로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배우며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힘을 내고 있으니 응원받고 칭찬받을만한 거 아닌가? 이런 나에게 ‘너는 손이 느려서 요식업도 못 할 거고 어딜 가든 문제이고 먹고 사는 일이 정말 깜깜하다’하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서 평소에는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그 장면과 생각과 마음을 더듬어 보며 자동적 사고를 기록하고 나서야 알아차려 진다. 상담은 끝났지만, 자동적 사고를 기록하는 습관이 남았다. 치열하게 노력했던 상담이 끝났으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느긋하게 지내려 했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려면 자동적 사고를 기록해야만 하는 거였다. 책상에 앉아서 마주하기 싫은 것들을 직시하는 시간이 없이는 평안도 없다.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과하는 것뿐이다.’라는 브래드쇼의 책에서 읽은 구절을 마음에 다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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