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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글

공을 넘기는 기분

by 틔움 2021. 2. 13.


팟캐스트에서 전미경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내가 끌어안지 않아도 될 공을 끌어안고 있지는 않나 생각했다. 공을 넘긴다는 뜻을 설명하기 위해 예시로 나온 상황은 이런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나에게 제사 때 오라고 했고, 나는 마침 근무시간이 겹쳐서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시어머니에게 ‘제가 근무가 있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대안으로 ‘대신 제가 일 마치고 가서 상치우는 것 도울게요’ 라고 덧붙일 수 있다. 그게 바로 공을 넘기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가 무엇인지 상대에게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약 시어머니가 그래도 스케쥴을 조정해서 꼭 오라고 다시 공을 던질 수도 있지만, 그러면 내 쪽에서도 이번에는 남편에게 공을 넘겨서 당신이 어머니에게 설명 좀 해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타인으로부터 공을 받으면 상대에게 다시 던져야, 과도하게 미안해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공을 수차례 주고 받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구나 하고 도움이 되는 말들을 마음 속에 저장해두었다.

어제 밤에 카톡 하나를 받았다. 이름만 봐도 헉 하게 되는, 헤어진지 5년이 지난 전애인으로부터. 잊을만하면 뜬금없이 연락이 오곤 한다. 3개월 전에는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내 생각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카톡을 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거의 1년만에 온 연락이라 아직도 그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새벽 세시가 넘어 와있는 카톡을 보고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보나마나 술을 잔뜩 먹고 자기 기분에 취해서 메시지를 보낸 거겠지. 대화방을 나왔다. 헤어진 후에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매번 이런식으로 연락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나빴다. 그 뿐만 아니라 헤어진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는 게, 내가 별로인 사람이라는 증거로 여겨졌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오르락 내리락거리면서 마음을 들쑤셨다. 좋았던 때도 생각나고, 힘들었던 때도 생각나고, 그와 헤어지게 된 사건들에 대해서도 생각났다. 왜 연락을 해가지고 사람 마음을 이렇게 심란하게 하는지 원망도 들었고, 차라리 그 때 그냥 대화방을 나가지말고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화라도 낼 것을, 혼자서 화내고 삭히고 이게 무슨짓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너 이놈 잘 걸렸다. 몇 초간 고민하다가 그에게 답장을 하기로 했다. 새해 인사에 화답하며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그리고 술먹고 연락 좀 하지말라고 했다. 그런 연락 받는 거 기분 별로 안좋고 뭐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당황했는지 미안하다고 하며, 새해 복 다 받으란다. 알겠다고 잘 지내라고 했더니, 언제 서울 오면 밥한끼 하자고 한다.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힘든 기억 잔뜩 남긴채로 헤어진 사이인데, 가볍게 만나 밥한끼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솔직하게, 별로 편하지 않을 것 같다고 각자 잘 지내자고 답장을 했다. 그는 당황했는지 지난 번 새벽에 연락한 것에 대해 다시 사과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마음을 숨기느라 애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서운한 마음도 없이 솔직하게 답변하니 후련했다. 공을 던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는 공을 잘보고, 내 마음이 어떤지 잘 보고, 나에게 온 공을 냅다 쳤다. 이 관계에 대해서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쩌면 내가 공을 껴안고 혼자서 감정을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 공을 바로바로 던지는 홀가분함이 바로 이런 걸까. 얼마 전 상담을 통해서 그와 마지막 만난 날로 돌아가 내 감정을 이해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덕분에 내가 공을 던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제 그와 주고받은 카톡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덤덤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니 정말 멋지다. 오랜 숙제 하나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후련하다. 이 감각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공을 잘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지.



#공을넘기다 #글쓰기 #자니 #전남친연락 #왕만니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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