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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글

더 나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아

by 틔움 2022. 2. 14.


무엇이 진짜 나의 목소리이고 욕구일까.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서 벗어나 나의 욕구대로 살고싶다는 바람을 구체적으로 인식한지 5년 정도가 흘렀다.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직업에 대하여 갈팡질팡 길을 헤맸다. 내려온 직후에는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아르헨티나 두 달 살이를 목표로 돈을 모으고 여행을 다녀왔었고, 성평등활동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기도 했고, 일을 그만두고나서 농부를 꿈꾸며 농부학교에 다녔고, 작년에는 비건식당 창업 준비를 위해 주방에서 일경험을 쌓기도 하고 비건 팝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농부와 비건식당에 대한 꿈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이유보다는 나에게 부족하다 여겨지는 면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농부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생명을 틔우고 길러내며 일일이 돌본다. 그 과정은 녹록치 않고 사람의 계획대로 될리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인내심, 세심함, 정성을 필요로한다. 그런 멋진 일을 해낸다면 분명히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내가 그린 비건 술집은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위로를, 즐거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즐거움을, 공간과 음식, 술을 통해 주는 곳이다. 그렇게 사람들과 연결되고 사람들 속에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꿈들을 꾸는 동안에는 더 나은 나를 상상했다. 뭐 하나 끈기있게 해내는 능력이 부족한 나, 사람들을 어려워하고 관계 속에서 잔뜩 긴장하고 후회하는 내가 아닌, 더 멋지고, 더 성숙한, 더 완벽한 미래의 나를. 농부가 되기 위해, 비건 식당을 차리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나가는 과정에서 분명히 배우고 성장한 부분이 있고 행복한 순간들도 많이 있었지만 문득 그런 질문이 생겼다. 그 일들이 나에게 행복을 줄까? 모자란 부분을 채우려고 애쓰는 삶 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상하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작할 자본이 부족하다는 점이 큰 장애물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음 속 뭔가가 자꾸만 불편하고, '이 길이 내 길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나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 노트에 쭉 써봤다. '되고 싶은 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지만, 내가 행복을 느끼는 구체적인 순간은 '되고 싶은 나'와 꼭 맞닿아있지 않았다. 산책하다 멈춰서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 당할 때, 나홀로 극장에서 영화에 푹 빠져 울고 웃을 때, 내 손으로 요리하고 그 음식을 먹을 때, 치자가 내게 기대어 작은 몸의 온기를 느낄 때, 좋아하는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을 때. 바라는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이미 내 삶 속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많이 있다. 지금의 행복을 계속해서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 아닐까.

지난 5년 동안(크게 보자면 지난 10년 동안) 크든 작든 직업에 대한 방향이 계속해서 바뀌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변덕을 부려도 되나 걱정이 되고, 계속해서 방향이 바뀜에 따라서 혼란스럽고 피곤하기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므로 당연히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도 달라지는 것 같다. 비건 식당과 농부라는 꿈을 멀리 내던지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다시 도전해볼 수도 있겠지. 오 년 후, 십 년 후에 지금과 달라진 내가 다시 방향을 새롭게 정한다면 그때는 또 다시 그때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행복을 지키는 선에서 얼마든지 무엇이든 되면서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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