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글

장보기에 대해서

틔움 2021. 1. 27. 18:51

집에서 지내며 내 손으로 밥을 차려먹는 요즘, 거의 매일같이 장보기를 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완주로컬푸드직매장이다. 농부들이 직접 지은 농산물을 가져와서 물건을 진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소비자는 포장 라벨에 적혀있는 생산지, 생산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 있다. 저녁 무렵에 가면 매대가 텅하니 비어있어서 오전에 가야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 이곳에서 주로 감자, 당근, 버섯, 상추, 두부, 무, 애호박 같은 야채류를 사고, 제철 과일이나 지역 브랜드에서 만드는 떡이나 쌀빵 같은 것도 사고, 가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꽃도 산다. 옆동 친구는 처음에 로컬매장을 이용하기 시작했을 때에 농산품이 맛있으면 생산자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너무 맛있게 농사지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기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농사 지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참 귀한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출처에 대해 잘 모르고 먹으니까. 내가 먹는 상추가 자라는 밭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농약을 쓰는지, 밭이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하면 환경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든다.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쉽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비행기가 운전되어야 하고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물품의 포장을 위한 쓰레기들도 오염의 원인이 된다. 이야기가 먼 곳까지 갔지만 그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비하는 것이 좋다.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역에서 난 음식이, 지역에서 발 붙이고 살고 있는 내 몸에게 가장 잘 맞고 이롭다고 생각한다.

로컬푸드매장에서 파는 것들로만 만족하기엔, 이미 내 몸뚱아리와 내 혀가 넓은 세상의 맛에 익숙해져있다. 대기업에서 나온 과자나 음료들도 먹고 싶고, 올리브나 다양한 스파게티면, 해외에서 온 소스들, 아보카도나 오렌지, 더 잘 만들어지고 널리 쓰이는 유명한 제품이 사고 싶다. 동네에는 a마트, b마트, 롯데슈퍼, 노브랜드 슈퍼, 총 네개의 마트가 있다.
a마트는 아주 가깝지만 물건이 다양하지 않고, 가격도 조금 비싼 편이다. 유독 저렴한 물건들도 있다. 라면사리와 탄산수가 특히 싸다. 가끔 농익은 바나나를 싸게 팔 때도 있다. 급하게 뭔가 사야할 때나 늦은 밤이라 멀리 가기 꺼려질 때도 이 곳에 간다. b마트는 a마트보다 규모가 2~3배 커서 뭐든지 좀 다양한 선택지가 필요할 때에 찾는다. 규모가 크긴한데 은근히 내가 찾는 건 잘 없는 것은 반전. a마트와 b마트는 로컬푸드 다음으로 나의 장보기 우선순위 장소이며 그 이유는 지역 마트이기 때문이다. 롯데슈퍼나 노브랜드 상품들이 젊은 감성에도 맞고 좀 더 세련되지만, 가능하면 대기업이 아닌 지역의 마트에서 소비하는 것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대로 살기는 쉽지 않다.
롯데슈퍼에는 와인도 있고, 정육, 수산, 빵, 반찬이 있고 세일하는 제품들이 꽤 많다. 아보카도를 개당 1,150원에 팔아서, 이삼일에 하나씩 아보카도를 먹을 때도 있었다. 효성 어묵을 파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해외 맥주가 저렴하고, 해외에서 온 소스류도 나름 갖춰져있다. 국내산 콩 두부가 천원대 초반이고, 동물복지란도 살 수 있다. 묵무침이나 들깨소스샐러드 같은 반찬류는 저녁에 가면 원플러스 원인데 맛이 꽤 괜찮다. 플라스틱 용기가 쓸떼없이 거창해서 이제는 잘 안사지만.
노브랜드는 과자가 무척 저렴하다. 노브랜드 자체브랜드로 나온 상품들이 맛도 얼추 괜찮고, 가격은 아주 저렴해서 유혹적이다. 냉동식품도 다양하다. 새롭게 시도해봤던 치즈볼과 새우교자는 모두 실패였지만. 900원대의 피넛버터 과자와 천원대 초반의 프링글스와 비슷한 감자칩은 꽤 맛있었다.
동네마트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은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서 찾는다. 층간소음 방지용 슬리퍼는 동네 마트를 두세군데와 다이소까지 돌았지만 맘에드는 것을 찾지 못하다가 홈플러스에서 맘에 드는 것을 찾았다. 와인이 다양한 것이 무척 큰 매력포인트이다. 허브나 레몬 같은 것도 있고, 제철이 아닌 농산물도 있다. 해외에서 온 물건들도 이곳에 가장 많다. 품질 좋은 주방용품을 구할 수 있고, 유기농 생리대도 저렴하다. 대형마트는 역시 선택지가 가장 넓다.

이렇게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장을 봐야한다는 사실이 너무 귀찮고 수고스럽게 느껴지기는 한다. 지금은 직업이 없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장보기에 들일 에너지가 충분하지만, 매일같이 해야하는 일이 생긴다면 인터넷으로 장을 보거나 그냥 대형마트에 가서 모든 것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장을 한군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겨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한 번에 가능한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곳에 간다면 무조건 답은 대형마트이고, 심지어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장을 보는 것은 많은 에너지와 돈을 줄여주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공짜는 아니며, 그로 인한 영향은 돌고돌아 우리에게 어떻게 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알 것이다. 모든 사람이 탄소가스와 포장재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직접 장을 봐야한다고, 그리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을 사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나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지도 않다. 지속가능한 지구, 삶에 대해서 걱정을 넘어서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도 참 기쁜 일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몇 주 전부터 김을 먹고 싶었는데, 마트에서 파는 걸 사고 싶지 않아서 망설이기만 하다가, 며칠 전엔 자주 지나가던 길가에서 김가게를 발견했다. 사실 발견은 예전부터 했었는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 처음이다. 보기에 아주 허름하고 좁은, 오래된 가게였는데, 김만을 팔아서 오래 살아남았다면 맛있을 확률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확인해보기로 했다. 김을 굽는 것이 방에서 티비보는 것만큼 익숙해보이는 사장님은 매대에 진열된 김을 만지작 거리는 나에게 그건 견본품이니 자기에게 필요한 수량을 말하라고 했다. 왠지 현금을 내야할 것만 같아서 5천원을 내밀고 구운 김 한봉지와 김자반 한봉지를 샀다. 집에 돌아와 먹어보고 나서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가게를 발견했다며 유레카를 외쳤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음악을 들으며 김을 굽던 아저씨 얼굴이 떠오르며 김 굽기의 장인처럼 느껴졌다. 생산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아는 것보다, 생산자에게 직접 사는 편이 조금 더 기쁘고 믿음직스럽다. 새로 알게 된 김가게처럼 이런 동네 가게들을 많이 알고 싶다. 장보기의 지역화(?)를 이뤄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며칠전 밥상. 대부분의 재료가 지역에서 생산된 것들이라 뿌듯하고, 더 맛있었다.